신영균(전 동아대학교 체육학과 교수)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부터라 할 수 있다. 1866년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와 싸움을 벌인 병인양요, 그리고 1871년 아시아 팽창주의를 추진한 미국과의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들이 벌인 갑오경장을 계기로 서구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이에 근대 스포츠들도 하나 둘씩 조선에 도입되고 소개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야구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1901년에 조선으로 입국한 필립 질레트 선교사는 1903년 YMCA를 창립하였고, 이것이 훗날 서울 YMCA의 전신인 '황성 YMCA'로 발전하게 된다. 창립 5년 후인 1908년 종로에 YMCA 회관을 준공하였는데, 이 회관에는 체육실이 있어서 한국의 근대 실내 체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최초의 체육관이라 볼 수 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선 결국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는데 당시의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야구대회였던 이 대회는 이후 축구와 테니스, 육상, 농구 등의 종목이 추가되면서 종합 체육대회의 면모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해방 이후 전국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 근대체육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체육회는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을 함양시켜 민족정기를 살리자는 취지로 1920년 7월 13일 창립되었다. 1920년은 일제강점기로 3.1운동의 민족자주독립의 거센 회오리가 지난 다음해이다. 3.1 민족적 저항운동에 큰 충격을 받은 일제는 문화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을 허용하는 등 유화책을 폈고 조선체육회의 출범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짧은 유화정책의 시기였지만 거창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스포츠 관련된 소년단체는 1921년 5월에 창립된 ‘거창삼육회’라 할 수 있는데 창단 목적은 회원의 덕성을 함양하고 체육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 취지는 식민지하에 지역 소년과 소녀들의 심신을 단련시키고 의식을 계몽하겠다는 목적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거창에도 문헌적 고찰을 통해 이시기에 근대스포츠의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11월 4일 제1회 전조선인야구대회를 연 이후 종목별 전국대회를 주최하다가 1934년 종목별 경기대회를 통합하여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열어 근대스포츠문화의 토대를 만들었다. 1936년 8월 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의 우승과 남승용의 3위는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쾌거였다. 그러나 기쁨 보다는 가장 슬픈 시상대의 모습으로 식민지의 아픔을 표현했고 민족의 대변지였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 등으로 조선체육회는 1938년 7월 4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그 이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우리사회의 당면과제는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곧바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자주적인 민주 독립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비교적 신속하게 1945년 11월 25일 여러 사회단체 중에도 먼저 조선체육회가 부활 되었다. 조선체육회의 재건은 민족체육의 부활을 의미 한다. 이는 3.1독립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정기를 민족체육의 그릇 속에 담아 보존하고자 노력했던 조선체육회 18년의 역사를 민족광복의 새 역사로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조선체육회는 1958년 제5회 생모리츠 동계올림픽과 제14회 런던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세우고 대책을 강구 했다. 우선 올림픽대회 출전을 위해서는 국내올림픽 기구를 구성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1947년 6월 15일 조선올림픽위원회(KOC)를 결성했다.
IOC는 1947년 6월 20일 개최된 스톡홀름 총회에서 조선올림픽위원회를 승인했는데, IOC 역사상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국가단위 올림픽위원회가 승인된 것은 KOC가 유일하다. KOC의 승인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되어 신생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국제사회에서 공인 받은 것을 의미했다.
올림픽은 국제스포츠 교류의 꽃으로 단순한 국제경기 대회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참가하는 스포츠 외교의 최고 무대이다. 정부도 수립되기 전에 활발한 스포츠외교를 펼쳐 IOC에 가입하고 올림픽에 출전할 경비를 모집하기 위해 올림픽대회 후원회를 조직하여 국민성금 모금용 “올림픽 후원권”까지 발행했다. 1947년 12월부터 판매된 올림픽 후원권은 100만여 장이 팔려 그 수익금이 8만여 달러를 자생적 노력으로 마련함으로써 올림픽대회 출전경비를 거의 충당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올림픽대회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와 성의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근대 체육스포츠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건민과 저항으로 시작했으나 광복과 함께 올림픽참가를 계기로 국가주의적 이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